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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루스

  인간이 하늘을 날고 싶다는 욕망은 선사시대 부터 시작되었다. 옛날 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많은 이야기들은 '하늘은 난다' 는 주제를 담고 있다. 예를들자면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와 다이달로스의 이야기와 고대 인도 서사시의 비마나(Vimana) 가 대표적인 예 이다. 기원전 400년 경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 이자 수학자, 천문학자, 정치가, 전략가 였던 아르키타스는 최초로 자체 동력으로 하늘을 나는 것을 발명하였다고 알려진다. 그는 자신의 발명품에 '비둘기(The Pigeon, 그리스 말로 Περιστέρα "Peristera" )' 라는 이름을 부쳤으며 그의 발명품은 새 처럼 생긴 모델로 아마 증기를 이용해 프로펠라를 돌렸으며 안정적인 비행을 위해 긴 줄로 연결했다고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의 발명품이 거의 200m 가까히 날아갔다는 사실이다.

공명 랜턴

  열기구의 원형은 고대 중국에서 최초로 만들어 졌다. 이 열기구의 원형은 이 열기구를 만들었던 중국의 장군 제갈 공명(Zhuege Liang , 180~234 AD ) 이 이름을 따 공명 랜턴(Kongming lantern) 이라 이름 붙여졌다. 그는 이 열기구를 이용해 적군을 두려움에 빠뜨렸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기름 램프가 커다란 종이 가방 아래 설치되었고 그 종이 가방은 뜨거운 공기로 인해 위로 상승하였다. 적군은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불빛으로 인해 마치 하늘이 그들의 적을 돕는다고 생각하며 겁을 먹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종이 가방을 이용한 열기구는 J기원전 3 세기 경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5 세기에는 중국의 루 반(Lu Ban) 이 '나무로 만든 새' 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그 것이 정확히 무었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아마 커다란 연이나 글라이더의 원형이라 추측한다. 쿠빌라이 칸(Kublai Khan) 의 지배 아래 있었던 원나라 때 (13 세기) 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램프를 만들어 하늘로 날려보내는 축제가 인기가 많았다. 이와 같은 직육면체 모양의 랜턴은 실크 로드를 통해 중앙 아시아와 중동 지방까지 퍼져서 티벳의 축제나 인도의 축제인 Diwali 에서도 직육면체 모양의 랜턴을 하늘로 날려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직육면체 랜턴에 사람이 탑승했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북위 시대인 559년에 커다란 연에 사람이 탑승해 올라갔다는 기록은 있다.

Abbas Ibn Firnas 의 비행


  이슬람의 우마이야 왕조일 때, 몇몇의 사람들이 아랍의 발명가였던 Abbas Ibn Firnas 가 국왕 Abd ar-Rahman II 의 지원을 받아 시도했던 비행을 목격하였다. 852년에 그는 나무 버팀목으로 고정된 날개를 달고 우마이야 모스크에서 뛰어내렸다. 비록 그는 날지는 못했으나 그의 날개 덕에 그는 떨어지는 속도를 조금 줄일 수 있어서 약간에 부상 밖에 입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장비는 현대의 낙하산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25년 후에, Ibn Firnas 가 65세 일 때, 그가 초보적인 글라이더를 타고 Jabal al-'arus 언덕에서 날아가기로 했다. 그가 글라이더를 타고 뛰어내리자 그는 추락했고 결국 그는 심한 부상을 당한다. 현대의 기술자들은 그의 글라이더가 추락한 원인이 꼬리날개가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의 도전은 후대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남겨서 약 100 년 뒤인 1010년에 그에게 영감을 받은 Eilmer of Malmesbury 는 글라이더를 만들어 200 m 가량을 날았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행글라이더 디자인

   Ibn Firnas 의 도전 이후 5세기가 지났을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행글라이더를 고안했다. 그의 행글라이더는 날개의 안쪽 부분이 고정이 되었고 행글라이더를 조종하는 부분은 앞쪽에 고안되어 있다. 그는 그의 아이디어를 노트에 상세히 적어놓았지만 그는 실제로 만들어서 날아보지는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고안했던 행글라이더를 만들어 날을 수 있는지 그가 아마 사용 할 수 있었던 재료들을 통해 만들어 보았다. 그 결과는 놀랍게도 '날 수 있다' 였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20 세기의 항공역학적 지식으로 해석되었고 만약 다빈치가 의도 했던 대로 만들었다면 날을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Hezarfen Ahmet Celebi 의 비행

  17 세기에 터키의  Evliya Çelebi 가 1630 ~ 1632년 사이 터키의 Hezarfen Ahmet Celebi 가 날개가 달린 비행물체를 이용해 이스탄불의 높이 62.59m 인 갈라타 탑에서 뛰어 내려 대략 3km 정도인 보스포러스 해협을 날아갔고 무사히 착륙했다고 했다. 1633년에 Hezafen 의 형이 Legari Hasan Çelebi 는 7개의 날개가 달린 로켓을 몸에 메달고 발사시켰다. 이는 최초로 인공 동력을 이용한 비행으로 기록됬는데 이 비행은 오토만 제국의 황제인 무라드 4 세가 딸을 낳은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였다. Evliya 는 Legari 가 로켓의 화약이 다 닳은 후 몸에 부착되 있던 날개를 펴서 보스포러스 해협에 무사히 착지했다고 보고했다. 그의 비행은 대략 20 초 정도 지속되었으며 그는 상공 300 m 까지 날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Legari 는 술탄으로 부터 오토만 제국의 군대의 높은 자리에 앉혀졌다고 한다.

Francesco Lana de Terzi 의 진공 기구

  1670년  Francesco Lana de Terzi 은 공기보다 가벼운 것을 이용하면 비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구리로 된 구를 진공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비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대기압을 간과해 버린 그는 찌그러진 구 만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

  비록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비행이 1900년도 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알고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도 100년 정인 1800 년대 에도 가능했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비행으로는 1783년 프랑스 파리에서 ean-François Pilâtre de Rozier 와 François Laurent d'Arlandes 가 열기구를 몽골피에 형제(Montgolfier brothers) 가 만든 열기구를 타고 8km 가량을 날아갔다. 현대의 열기구는 가스 버너를 이용하지만 그의 열기구는 장작에 불을 붙여서 공기를 데웠다. 18 세기의 후반에 들어서자 기구는 대유행이 되어 이를 통해 기압과 고도와의 관계를 밝혀내기도 했다.

Henri Giffard 의 증기 엔진 기구

  조종 가능한 기구를 제작하기 위해 1800년대 부터 연구가 계속되어왔다. 그 후 1852년에 Henri Giffard 가 프랑스에서 증기 엔진 장비를 이용해 최초로 기구를 24km 가량 '조종' 하였다. 1884년에는 프랑스 군의 Charles Renard 와 Arthur Krebs 가 전기동력을 이용해 자유롭게 조종 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길이 52m 의 부피가 1900㎥ 인 거대한 기구를 만들어서 23분 동안 8km 가량을 날았다.

  하지만 이런 기구들은 잘 부서졌고 별로 오랫동안 날지 못했다. 뿐만아니라 제 1,2 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비행기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기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비록 비행선들이 전쟁 속에서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그 다지 위력적인 모습은 보이지 못했다. 현대에서는 그 수가 매우 줄어 관광용 정도로 축소되었다.

Emanuel Swedenborg 의 저서에서의 스케치

  비행에 관련해 최초로 나온 책은 1716년에 Emanuel Swedenborg 가 출판한 "하늘에서 날으는 기계에 대한 스케치(Sketch of a Machine for Flying in the Air)" 이다. 이 '하늘을 날으 는 기계' 는 단단한 캔버스로 둘러쌓인 가벼운 프레임과 수직방향으로 움직이는 2개의 커다란 노 (날개) 가 달려있어 부양할 수 있는 힘을 주게 했다. Swedenborg 는 자신이 설계한 기계가 날지 못할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날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George Cayley 경의 글라이더

  18세기 후반에 George Cayley 경은 비행에 대한 물리학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 1799년에 글라이더를 만들 계획을 세웠는데 그의 아이디어는 현대의 글라이더와 매우 비슷한 모습을 갖추었다. 예를 들자면, 꼬리날개 조종이나 안정적인 비행을 위해 조종사가 무게중심 아래에 위치한다던지 등이다. 그는 그의 글라이더를 1804년에 날렸다. 그 후 10년간에 연구 끝에 기초적인 항공역학을 창시하였고 'lift' 나 'drag' 와 같은 비행에 관한 단어들도 만들게 되었다. 또한 화약으로 동작하는 엔진도 만들었으나 Alphonse Penaud 가 고무를 이용해 더 강력한고 간단한 엔진을 만들었기에 그의 화약 엔진은 잊혀졌다. 그는 1849년에 글라이더를 실물 크기로 다시 만들어 성공적으로 날렸고 (사람은 탑승하지 않았다. ) 1853년에는 사람을 테워 요크셔(Yorkshire) 의 Scarborough 근처까지 날았다.

John Stringfellow 의 비행기

  1848년에 John Stringfellow 는 증기 기관 모델을 이용해 영국 서머셋에서 성공적인 시헙비행을 하였다. 1866년에 폴란드의 농부이자 목수인 Jan Wnęk 이 조종할 수 있는 글라이더를 날렸다. 그는 비록 문맹이고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나 새들의 비행에 대한 자세한 관찰로 스스로 글라이더를 만들 수 있었다. Wnęk 은 밧줄로 글라이더와 자신의 몸을 묵고 날개의 끗 부분을 조종을 하여서 글라이더를 조종할 수 있었다. 교회의 기록에 따르면 Wnęk 이 Odporyszów 교회 탑에서 글라이더를 날렸다고 한다. 그 탑은 높이가 45m 고 탑 자체도 높이가 50m 인 언덕위에 있었기 때문에 골짜기 밑으로 부터 대략 95m 나 높은 곳 이였다. 그는 1866 ~ 1968년 까지 특히 종교적인 축제인 새해 행사 등에서 공개적인 비행을 하였다. 그가 글을 쓸 줄을 몰랐기 때문에 어떠한 자료나 그림도 남기지 않았으며 따라서 비행사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또한 위와 같은 사실이 밝혀진 것도 최근들어 한 교회 기록을 통해 밝혀진 사실 이다.

Jean-Marie Le Bris 의 글라이더

  1856년에 프랑스인인 Jean-Marie Le Bris 가 최초로 자신이 출발 한 고도보다도 더 높이 올라갔다. 그는 자신의 글라이더인 L'Albatros artificiel" 를 타고 200m 넘게 날아 100m 높이 까지 올라갔다. 1874년에는 Félix du Temple 이 알루미늄으로 만든 "Monoplane" 을 만들었는데 그 비행기는 날개 길이가 13m 였고 조종사가 타지 않은 상태에서 잰 무게가 80kg 였다. 이 글라이더는 스키 점프대 같은 곳에서 날린 후 자체 동력으로 짧게 날며 무사히 착륙했는데 이는 최초의 성공적인 동력 비행이였다. ( 물론 짧은 시간 동안 날았다.)

Francis Herbert Wenham 의 글라이더

  Francis Herbert Wenham 은 몇몇의 이름 붙여지지 않은 글라이더를 제작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몇 가지 발견하였는데 비행기를 들어올리는 힘인 양력은 대부분 날개의 앞부분의 작용한다는 사실로, 그 때까지 만들어 왔던 박쥐 모양의 날개보다 얇고 긴 날개가 더 유용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현대에는 이를 aspect ratio (비행기의 날개의 가로와 세로 길이의 비) 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의 발견을 왕립 항공 협회에 제출하였고 이를 보였다. 이는 공기보다 무거운 비행물체를 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계기였다. 다만 이제 남은 문제는 '그러면 그 비행물체를 어떻게 조종해야 할 것이가 ? '였다.

  1880 년대에는 항공역학에 대해 많은 발전이 있었다. 스스로를 '점잖은 과학자(gentleman scientists)' 라 부르는 과학자들이 20 세기 까지 많은 기여를 하였다. 1880년대에는 3명의 과학자인 오토 릴리엔탈(Otto Lilienthal), 퍼시 필처(Percy Pilcher), 옥타브 샤누트(Octave Chanute) 를 통해 최초의 실용적인 글라이더가 탄생하였다. 최초의 현대적인 글라이더는 John J. Montgomery 가 만들었으며 이는 산디에고 외곽지역에서 날렸다. 그 글라이더는 조종이 가능하였다.

오토 릴리엔탈과 그의 글라이더

  독일의 오토 릴리엔탈은 Wenham 의 아이디어를 수용하고 이를 크게 확장시켜 1889년 논문을 발표한다. 또한 릴리엔탈은 매우 향상된 글라이더를 만들게 되어 1891년에는 25m 이상을 안정적이게 날아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는 "뛰기 전에 날지말자" 라는 말을 몸소 실천한 사람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기계를 디자인이나 설계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반면 릴리엔탈은 자신이 생각한 아이디어를 모두 실행에 옮기며 몸소 보여준 도전적인 과학자였다.

오토 릴리엔탈

  1896년에 그가 사망할 때 까지 그는 여러 종류의 글라이더를 타며 2500 번 이상의 비행을 하였다. 그러나 1896년에 그의 글라이더의 날개 한쪽이 부러져 그는 17m 상공에서 추락했다. 결국 그 일로 인해 척추가 부러져 다음 날 사망에 이르렸다. 그는 임종 직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작은 희생도 큰 것을 위해 있어야 하느리라"


옥타브 샤누트와 그의 글라이더

   릴리엔탈의 뒤를 이어 옥타브 샤누트가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일찍 은퇴를 한 후, 몇몇의 글라이더를 개발하는데 자금을 대었다. 1896년 여름에 그는 그의 팀과 함께 밀러 해변가(Miller Beach) 에서 여러 종류의 디자인의 글라이더를 날려보고 있었는데 날린 글라이더 중 가장 잘 날랐던 것이 바로 복엽기였다. 그는 복엽기에 큰 흥미를 느끼게 되어 릴리엔탈처럼 그가 발견한 사실을 세세하게 기록했고 또 사진으로 남겼다. 샤누트가 가장 큰 관심을 두었던 것은 하늘에서 안정적으로 비행하는 것이였다. 새들은 자신의 본능을 통해 안정적으로 날지만 인간이 조종하는 글라이더는 계속해서 조정해주어야만 했다. 비행 시 가장 불안정했던 부분은 세로안정성(longitudinal stability) 로 즉, 조종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으면 비행기는 스스로 상승 또는 하강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날개의 받음각(Angle of attack) 이 커지면 압력의 중심이 앞으로 이동하여 그 각을 더욱 커지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로 조정해 주지 않는다면 피치가 위로 올라가 실속상태에 빠져 추락하기 때문이다.


Clément Ader 과 그의 비행기

  이 기간 동안 동력 비행을 위한 몇 가지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실패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Clément Ader 가 성공적으로 증기 동력을 이용한 비행기인 Eole 을 1890년 파리 외각자역에서 50m 가량 날렸다. 이는 그 때까지 나온 자체 동력 비행기들 중에서 매우 멀리 날린 것으로 이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그는 즉각 좀더 확대한 비행기를 제작했다. 하지만 그가 새로 제작한 Avion III 는 너무 크고 무거워서 지면을 뜨지 못하였다. 이는 지면에 거의 붙어가다 싶이 300m 가량을 날아(?) 갔다.

Hiram Maxim 경의 거대한 비행기

  영국의 히람 맥심 경은 (Sir Hiram Maxim) 은 몇몇의 비행기 디자인을 연구했고 결국 무게가 3125kg 에 날개 길이만 32m 인 거대한 비행기를 제작하였다. 이는 2개의 증기기관이 달렸다. (각각 134kW) 맥심은 자신이 제작한 비행기가 구조 상의 문제와 동력이 부족하다는 문제 및 조종 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에 날기에는 매우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닿고 시험비행을 위해 550m 나 되는 트랙을 제작하였다. 1894년에 몇몇의 시험 비행을 마친 후 문제점을 보완한 비행기로 성공적으로 날았다. 그의 비행기는 트랙 끝에 가서는 속도가 68km/h 까지 올랐으며 트랙을 벗어난 직후 60m 상공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1900년대에 들어서자 그는 부족한 자금으로 그의 가솔린 엔진 비행기를 테스트 할 수 없었다.

Samuel Pierpont Langley 의 포트맥 강에서의 비행

  그 외에도 스미소니언 협회(Smithsonian Institution) 의 비서였던 새뮤얼 랭리 (Samuel Pierpont Langley) 는 현재의 피츠버그 대학에서 (University of Pittsburgh) 항공 역학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 1891년에 그는 그의 연구를 토대로  Experiments in Aerodynamics 라는 책을 출판했다. 또한 1896년 5월 6일에는 버지니아 주의 포트맥 강에서 자신이 만든 Aerodrome No. 5 라는 비행기를 가지고 날렸다. 비행사는 타지 않았으며 2번의 비행시도가 있었는데 한 번은 1005m 까지 날라갔고 두번째 것은 700m 가량 시속 25마일의 속도로 날아갔다. 1896년 11월 28일에는 Aerodrome No. 6  이라고 붙여진 비행기를 날렸으며 이 비행은 알렉산더 그레이험 벨(Alexander Graham Bell)이 사진을 찍었다. 이 비행에서는 1460m 가량 날랐다.

퍼시 필처

  영국에서는 퍼시 필처가 The Bat, The Beetle, The Gull, The Hawk 라 이름 붙여진 4 개의 글라이더를 만들었다. 이는 1890~1899년 중엽 사이에 날려졌으며 그 후에도 자체 동력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의 원형을 제작하였다. 최근의 연구에 다르면 그가 제작했던 원형이 실제로 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원형을 테스트 하기 전에 그는 글라이더 사고로 사망하였고 그의 업적은 잊혀졌다.

라이트 형제

그러나, 이제 어느 때 보다도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라이트 형제이다. 라이트 형제는 1900~1902년 사이 비행기를 조종하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연과 글랄이더를 만들어 몇 가지 실험을 하였다. 1900년에 그들은 그들의 첫 번째 글라이더를 날렸지만 그들이 예상했던 정도의 반 정도 밖에 가지 못했다. 두 번째로 만든 글라이더는 이전의 것 보다 더욱 안 좋았다. 그러나 라이트 형제는 포기를 택하기 보다는 추락한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풍동을 만들어서 200가지의 날개 디자인들을 테스트 하였다. 결과적으로 라이트 형제는 이전에 만들었던 글라이더를 보완하여 날개의 가로세로비(aspect ratio) 를 늘리고 조종할 수 있게 하여 1902년에 그들의 3번째 글라이더를 날리게 된다. 이는 이전에 모델보다 매우 잘 날았다. 또한 그들이 글라이더 추락의 원인을 분석하는데 사용하였던 풍동의 개발은 후에 항공 공학의 발전을 도왔다.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의 동력문제과 조종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것이 힘들어 보였으나 비행에 대한 열정을 멈춘 적은 없었다. 결국 라이트 형제는 롤 제어(roll control) 을 위한 날개 구부림(wing warping) 과 러더(rudder, 방향타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행기를 좌우로 기울여 방향을 바꿀 때 쓴다) 을 이용해 해결하였다. 또한 그들은 내연 엔진을 만들었다. 날개 구부림은 비행 역사에서 매우 짧은 시간동안 사용되었으나, 러더 제어는 현재 까지도 비행기 조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비록 이전이 비행 선구자들이 비행에서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지는 않았으나 라이트 형제는 추락 사고로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겪은 후 안전을 제일로 삼게 되었다.

키티호크 에서의 비행

  스미소니언 협회와 국제 항공 연맹(FAI, Federation Aeronautique Internationale) 에 따르면 라이트 형제가 1903년에 노스 캐롤리나(North Carolina) 의 킬 데블 언덕(Kill Devil Hills) 에서 최초로 '조종 가능하고', '안정되고', '자체 동력을 통한' 유인 비행을  하였다.첫 번째 비행은 오빌 라이트(Orville Wright)가 하였고 그의 비행서는 12초 가량 37m를 날았다. 같은날, 4번째 비행시도에서는 윌버 라이트(Willbur Wright)가 59초 동안 260m 가량을 날았다. 그의 비행은 3명의 해안 안전 경비원, 지역 비즈니스맨, 그리고 마을의한 소년에 의해 목격되었다. 라이트 형제는 안전을 위해 지면에서 약간만 떨어져서 날았기 때문에 조종을 위한 공간이 충분치 않았다.

허프만 초원에서의 비행

  라이트 형제는 1904~1905년 동안 허프만 초원(Huffman Prairie) 에서 비행을 계속하였다. 1905년 6월 14일에 있었던 추락 사고로 그들은 비행기를 다시 만들고 몇 가지 주요한 디자인 상의 변화를 가했다. 그들은 승강타(elevator, 비행기의 기수를 위, 아래로 조종한다) 와 방향타의 크기를 2 배 가량 늘렸고 날개로 부터도 2배 가량 떨어뜨렸다. 또한 그들은 승강타 사이에 바람개비(blinker 라고 부른다) 를 달아 날개로 하여금 약간의 상반각을 이루게 하였다. 라이트 형제는 또한 러더와 날개구부림 장치를 떨어뜨렸고 나중에는 각각 다른 조종 장비에 연결하였다. 결국 새로운 비행에서 이전과 다른 눈부신 발전을 보였다. 일단 Flyer I, II 에서 나타났던 심각한 피치(pitch, 흔히 기수 라고 한다) 의 불안정은 눈에 띄게 감소했고 이를 통해 반복되었던 추락이 감소하였다. 또한 Flyer III 의 비행은 30분 까지 지속되었다. Flyer III 은 결국 최초의 실용적인 비행기가 되었다. (비록 착륙 장치가 없었고 이륙 하기 위해 이륙 장비가 필요했다.) 비행기은 조종사 마음대로 잘 조종되었으며 처음 이륙했던 장소로 무사히 다시 착륙 할 수도 있었다. 1905년 10월 5일에는 윌버는 39km 가량을 40분 동안 날았다.

  비행기를 군사적 용도로 사용한 국가는 불가리아였다. 불가리아는 1912~1913년 동안 진행되던 제 1 차 발칸 전쟁에서 오토만(Ottoman) 의 진영을 정찰 및 공격하기 위한 용도로 비행기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비행기가 중요하게 다뤄졌던 전쟁은 제 1 차 세계대전이였다.


장군 Giulio Douhet

  제 1차 세계대전 전 까지 비행기를 무기로써 사용한다는 것은 단지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단지 비행기를 정찰 목적으로만 사용한다는 것이지 주요 무기로 사용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아 보였다. 대부분의 유럽군은 적은 수의 비행기를 가지고 있었고 그 것도 대부분 오래 전에 지어진 것이였다. 왜냐하면 당시 비행기들은 엔진 파워가 약했으며 적재 할 수 있는 기름의 양도 적었을 뿐더러 비행기 자체가 불에 매우 잘 타는 재질로 만들어 졌기 때문에 너무나 약했다. 그러나 비행기의 엄청난 능력을 예측한 이탈리아의 장군 Giulio Douhet  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이제 곧 하늘은 육지나 바다에서와 같이 중요한 격전지가 될 것이다.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작전 사령부와 공장들을 공격해서 적에게 제공권을 내주면 안된다.
  1911년에는 영국의 군인으로써 최초로 하늘을 난 사람인 장군 Bertram Dickson 가 항공기의 군사적 사용을 예측하였다. 그는 항공기가 처음에는 단지 정찰 목적으로 쓰이기만 하겠지만 나중에는 항공기를 통한 공격도 가능해 질 것이라 예측했다.

Roland Garros

  그 후, 1914년 프랑스의 Roland Garros 가 비행기의 앞면에 기관총을 붙인 이후 비행기의 막강한 화력이 보여지자 비행기의 중요성은 엄청나게 커지게 되었다. 당시 비행기들은 지금과는 달리 단지 기관총 하나로 공중전을 벌였기 때문에 비록 비행기의 속도가 느렸지만 상대방을 격추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에이스' 가 있었으며 대표적인 예로 Red Baron 이라는 별명을 가진 Manfred von Richthofen 은 포커 복엽기를 몰고 무려 80기 이상의 적기를 격추하였다.

슈나이더 트로피

  제 1 차 세계대전 이후, 항공기의 기술에서 큰 발달이 있었다. 나무로 만든 동체와 약한 엔진으로 가던 복엽기들이 매끄럽고 부드러운 알루미늄 동체와 강력한 엔진으로 대체되었다. 제 1 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많은 전투기 조종사들은 자신의 새로운 비행 기술을 보여주기를 원하였다. 많은 수의 전투기 조종사들이 마을을 돌며 자신들의 비행 능력을 뽐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몇몇의 조종사들이 비행단을 만들어 비행기 경주, 스턴트 등을 선보였다. 이 비행기 경주는 비행기 엔진의 발달에 기여하였다. 예를들자면 가장 빠른 비행기들에게 주는 상인 슈나이더 트로피 (Schneider Trophy) 을 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빠르고 매끄로운 단엽기 디자인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통해 스핏파이어 (Spitfire) 의 원형이 탄생하기도 했다. 많은 수의 조종사들이 상금을 타기 위해 빠르게 비행하는 대회에 참가하였다. 가장 유명한 예로는 Amelia Earhart 로 들 수 있는데 그녀는 에어쇼에서도 놀라운 묘기를 선보였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가로질러간 최초의 여성이기도 했다.

찰스 린드버그

  그 외에도 최장거리 비행기록과 최고속도 비행기록에 많은 상금이 걸려있어 비행기의 발달에 기여를 했다. 예를들자면 1919년 6월 15일에 John Alcock 대장과 Arthur Brown 중위는 Vickers Vimy 를 함께 조종해 뉴펀드렌드 (Newfoundland) 로 부터 아일랜드의 Clifden 까지 논스톱 비행에 성공하며 5만 달러의 상금 (Northcliffe 상) 을 거머쥐게 된다. 8년 뒤에는 찰스 린드버그 (Charles Lindbergh) 가 혼자서 대서양을 가로질러 비행하는데 성공하며 2만 5천달러의 상금을 거머쥐게 된다.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했던 비행선은 1919년 소코트란드의 East Lothian 에서 출발해 뉴욕의 롱 아일랜드에 도착했던 R34 로 영국 풀햄에 다시 돌아왔다. 1929년에는 비행선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해 비행선을 통한 세계일주가 가능해 지기 시작했다. 최초의 세계일주는 비행선 Graf Zeppelin 을 타고 1달간의 여정 끝에 세계일주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비행선의 시대는 1937년 힌덴부르코 호의 폭발로 막이 내리게 된다. 미국의 뉴저지의 Lakehurst 에서 착륙 중이였던 수소로 가득 채워진 힌덴부르크 호가 폭발한 후, 비록 그 처참한 사고 속에서도 97명의 승객 중 62명이나 살아남는 기적을 연출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비행선을 사용하지 않게되었다.

Frank Whittle

  1930년대에 독일과 영국에서 제트 엔진이 발명되며 비행기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프랭크 위틀(Frank Whittle) 가 1930년에 제트엔진 특허를 받았고 독일에서는 Hans von Ohain 이 1936년에 제트엔진 특허를 받았다. 그 두 사람들은 서로 제트 엔진을 발명했다는 사실에 대해 눈치를 못챘고 제 2 차 세계대전 끝까지 독일과 영국은 독자적으로 제트 엔진을 개발해 나갔다.

V-2

   제 2 차 세계대전을 통해 비행기의 기술의 발전과 대량생산이 가능케 되었다. 전쟁에 관여하였던 대다수의 국가들은 비행기의 생산시설을 확충하고 더 나은 비행기를 개발하는데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다. 또한 비행기를 통한 공격도 활발해졌는데 예를들자면 대형 폭격기를 통한 무차별 적인 폭격이였다. 뿐만아니라 세계 최초의 상용적인 제트 비행기와 크루즈 미사일(V-1), 최초의 탄도 미사일 (V-2), 최초의 유인 로켓 (Bachem Ba 349) 등이 등장하였으며 이 모두 독일에 의해 개발된 것이였다. 하지만 제트 전투기의 경우 그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연료와 조종사 부족으로 인해 상황을 악화시켰다. 게다가 V-1 의 경우 효율적이지 못하고 약했으며 V-2 는 목표물을 정확하게 명중시키지 못해 군사적으로 가치가 낮았다. (단지 민간인들을 겁주게 하는 데 에는 충분하였다.)


B-29 폭격기

  제 2 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상업적인 비행이 빠르게 발달하였다. 초기에는 보통 군에서 퇴역한 비행기들로 사람들을 수송하였지만 폭격기인 B-29 나 랭캐스터(Lancaster) 와 같은 비행기들이 상용 비행기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에 상업적인 비행이 빠르게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DC-3 는 장거리 비행을 더욱 쉽게 만들었다. 최초의 북미 제트 비행기는 1949년 발진한 Avro C102 제트 비행기이다. 그 후 몇년 뒤인 1952년에 영국의 항공사 BOAC 는 De Havilland Comet 비행기를 취항시켰다. 그러나 초기에는, 몇몇의 사고들이 있었는데 예를 들자면 기압의 증감의 반복을 통한 금속의 피로 현상으로 창문에 금이 가거나 비행기의 동체에 문제가 생기는 등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이러한 문제들이 보완되자 많은 수의 제트 비행기들이 하늘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Tupolev Tu-104 비행기

  구 소련의 아에로플로트(Aeroflot) 항공사는 1956년 9월 15일에 최초로 제트 항공기인 Tupolev Tu-104 와 보잉 707 을 정식 취항시켰다. 그 비행기들은 종전의 비행기들에 비해 편안하고 안전했으며 탑승자들의 기대도 매우 컸다고 한다.

Bell X-1 비행기

  1947년 10월에 척 예거(Chuck Ueager) 가 로켓 엔진인 벨 X-1 (Bell X-1) 을 타고 음속을돌파하였다. 비록 이전의 비행사들이 다이브범빙(Divebombin, 비행기를 급속도로 하강 시키면서 폭탄을 지상에 투하하는것) 도중 음속을 돌파하는 것을 경험했다는 일화가 있었으나 이 비행은 최초로 제어되고, 정확히 증명된 결과였다. 1948에서 1952년 사이에 최초로 대서양을 제트 비행기로 가로 지를 수 있게 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 까지의 논스톱 비행도 가능케 되었다.

비운의 비행기 Avro Arrow

  구 소련이 핵 무기등을 북아메리카와 유럽으로 운반할 수 있는 장거리 폭격기를 개발했을 때,, 서방국가들은 전투 요격기 (interceptor aircraft) 를 개발해 소련의 폭격기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요격 할 수 있게 하였다. 당시 캐나다에서는 고속 전투 요격기인 Avro Arrow 를 개발하였다.(이는 당시에 가장 빠른 비행기였다.) 그러나 1955년 대부분의 서방 국가들이 요격기의 시대가 유도 미사일의 시대가 된다는데 동의하였고 따라서 Avro Arrow 프로젝트는 1959년 취소되고 만다.

유리 가가린

  1961년에 들어서자 유리 가가린(Yuri Gagarin) 이 Vostok I 호를 타고 108분 동안 지구를 한 번 공전 하였다. 그는 마하 25 의 속도에서 마찰을 통해 속도를 열로 바꾸는 방법을 통해 속도를 줄이며 무사히 돌아왔다. 이는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 (Sputnik 1) 의 발사 이후 부터 시작된 우주 경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미국은 미국 최초의 우주인 Alan Shepard 를 머큐리 스페이스 캡슐에 태워 우주로 쏘아올렸고, 캐나다는 Alouette I 호를 우주로 쏘아올리며 3번째로 위성을 우주로 보낸 국가가 되었다. 결국 치열했던 미국과 소련의 우주 개발경쟁은 1969년 미국이 달에 사람을 보내게 되게 까지 이른다.

X-15 의 비행

  1967년에 X-15 는 비행기로써는 가장 빠르 마하 6.1 (시속 7297km/h) 의 기록을 세운다. 이 기록은 21세기에 들어 비행기를 거의 대기권 밖에서 날게 하는 방법을 통해 이 기록을 깨게 됩니다.

수직 이착륙기, 해리어

  영국은 해리어 수직 이착륙기(Harrier Jump Jet), 흔히 '해리어' 나 '수직 이착륙기' 라 불리는 제트 비행기를 개발에 수직/단거리 이착륙 (V/STOL) 이착륙을 비행기의 스러스트(thrust) 를 회전시키는 방법을 통해 가능케 하였다. 이는 1969년 처음으로 날았다. 같은 해, 닐 암스트롱 (Neil Armstrong), 버즈 올드린(Buzz Aldrin) 이 최초로 달에 발을 내딛었다. 또한 보잉사는 보잉 747 을 발표했고 최초의 초음속 민항기인 Aérospatiale-BAC Concorde (콩코드) 가 개발된다. 보잉 747은 에어버스 A380 이 개발되기 전 까지 가장 거대했던 비행기로 당시 무려 853명의 승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또한 1976년에 브리티시 항공(British Airwarys) 는 콩코드기를 통해 대서양을 초음속으로 가로지르는 서비스를 시작한다. 몇 년후에 정찰기인 SR-71 블랙버드 (SR-71 Blackbird) 는 대서양을 2시간 만에 가로지른다.


Gossamer Albatross 의 인간 동력을 이용한 비행

   1979년 Gossamer Albatross 가 최초로 인간의 힘을 동력으로 이용하는 비행기를 통해 도버 해협을 건넜다. 이를 통해 지난 몇 세기 동안 인류가 인간을 동력으로 하는 비행기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실현되었다. 1981년에 스페이스 셔틀(Space Shuttle)이 최초로 궤도 비행을 하며 거대한 셔틀도 우주로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스페이스 셔틀은 며칠 동안의 생명 유지장치를 제공하며 마치 비행기 처럼 활주로 까지 정확한 유도를 해주었다. 1986년에는 Dick Rutan 과 Jeana Yeager 가 최초로 논스톱으로 재급유 없이 세계 일주를 하였다. 1999년에는 Betrand Piccard 가 최초로 기구를 타며 세계 일주를 한 사람이 되었다.

  이 글에서는 항공기의 발달의 거의 2천 400년 역사를 방대하게 서술하였다. 우리는 흔히 생각한다. '뭐, 이번엔 제주도로 비행기타고 여행갈까?' 하지만 이 말 하나가 나오기 위해 무수히 많은 과학자들의 도전정신과 호기심, 또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통해 이루어 낸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기에, 예를 들자면 에펠탑에서 날개 달린 옷을 입고 뛰어 내린 사람을 보면 상당히 우습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편리하게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닐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의 편리함을 위해 수 많은 목숨을 바치시고 평생을 바치신 모든 분들께 존경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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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19 12:38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s://kevin0960.tistory.com BlogIcon Psi 2008.10.19 13:25 신고

      긴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 wa 2010.01.12 20:06 신고

      사진을 보면서 보니까 무척 재미있게 보았는데요.
      저의 얄팍한 지식으로는 퍼시 필처가 샤누트의 도움을
      받아서 엔진을 장착한 글라이더(비행기)의 무게에 대한
      해답을 편지로 교신했다고 하는데(복엽기의 날개를 세로로 2개를 더 붙여서 내구성과 양력을 동시해 얻었다고 하더군요.) 그 내용을 붙이면
      쉽게 연관지어 생각할수 있을 것 같아요